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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상호 "朴, 명예지킬 두번의 기회 스스로 차버려"

[레이더P]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윤범기, 김정범, 조선희 기자
  • 입력 : 2017-11-28 10:35:36   수정 : 2017-11-30 13: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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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案에 세월호 뺀 것은 비박계 이탈 막기위해
지난해 7월부터 최순실 관련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
탄핵 당일에도 안될거라고 확신한 靑, 오판 연속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촛불광장을 몸소 겪으면서 30년 전 광장을 떠올렸다. 그는 지난 1987년 민주화항쟁 당시 투쟁의 광장 복판에 서 있었다. 제도권인 국회에 들어와 두번째로 광장의 거대한 물결을 맞이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레이더P는 지난해 탄핵정국 당시 각 당의 지도부를 만나 막전막후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번 순서는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우상호 의원이다.

우상호 의원은 탄핵소추안에 세월호 내용을 뺀 것을 두고 "탄핵에 참가하는 비박계쪽과 의논했을 때 세월호를 넣으면 비박계에서 10~13명이 이탈한다고 전달해왔다"며 "우리당 입장에서는 만약 이것 때문에 탄핵이 실패하면 그러면 그게 세월호 유가족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걸까하는 고민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우 전 대표는 탄핵 전 당 내 특별 TF팀을 가동해 본격적으로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칠 준비를 했다. 어떤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7월말 8월초부터 구체적 제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면서 "제가 TF를 꾸린 이유는 의원들이 갖고 있던 정보들이 연결돼 있다고 보고 한 자리에 모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촛불의 열망을 알면서도 절충점을 찾아야 했던 것 역시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우 전 대표는 "12월 2일은 한두석으로 (가결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였다"면서 "12월 9일이 훨씬 안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촛불민심은 끓어 오르지만 제도권에서는 단계적으로 접근을 해야 했다"면서 "120석의 소수의석이 200석 만드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 바깥의 촛불은 끓어 올라도 초기에는 광장과 분리돼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탄핵에 기여한 이들을 꼽는 질문에 그는 "금메달은 촛불이자 시민들"이라며 "정치권이 무슨 메달 딸 자격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인터뷰 내용 중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이나 일방적 주장이 섞였을 수 있다. 그래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탄핵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다.

이하 일문일답.



1987년 광장과 2016년 광장

-1987년 2016년 두 번의 광장을 경험했다. 당시와 지금의 차이는.

▷30년 전인 87년의 광장은 훨씬 더 비장했다. 당시 이한열이란 학생이 최루탄에 피탄되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거리에 나갔다. 그 것은 뭘 의미하냐면 나도 똑같이 죽을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한 상황이자 목숨을 건 투쟁이기도했다. 그 때문에 훨씬 더 비장했고 폭력적 상황에서 거리를 나갔기 때문에 훨씬 더 긴박했다. 30년 후의 촛불은 광화문 광장이라는 공간이 확보돼 있었고 제도권에 있으니 촛불집회를 객관화해 볼 수 있게된 것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저는 87년에는 광장의 지도자였으니 정치권을 향해 압박을 넣는 입장이었다. 이번에는 촛불광장의 압박을 받는 입장이라 차이가 있었다.

-박지원 대표는 탄핵의 금메달은 김무성 은메달은 본인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본인이 자기를 은메달이라고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렇다고 민주당을 금메달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당시에 결과적으로 비박계가 탄핵에 합류하지 않았으면 탄핵이 됐겠냐 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건데. 금메달은 촛불이자 시민들이다. 정치권이 무슨 메달 딸 자격이 있겠나.

-탄핵일을 두고 12월 2일·7일·9일 등 말이 많았다.

▷탄핵을 처리할 수 있는 국회법의 규정상 이틀 연속 본회의가 소집돼 있는 날 해야한다. 그러면 여야 간 의사일정을 합의해놨을 때 당시 박완주 수석에게 가능한 본회의를 많이 잡아놓으라고 했다.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1·2일, 8·9일 이렇게 두번으로 연속 잡아놨는데 솔직히 12월 1·2일은 탄핵에 참여한는 비박계 의원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적어도 그 때의 의석수, 그러니까 탄핵을 통과시킬 수 있는 정족수가 확보 됐느냐는 측면에서 본다면 12월 2일은 한 두석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의석수를 헤아리는 일은 주로 원내대표의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12월 8·9일이 훨씬 안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깥의 촛불민심은 그런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하라는 것이었다. 촛불 나오시는 분들은 정치권이 12월 2일에 할 수 있는데 8·9일로 미루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간절함과 냉정함

-당시 일로 국민의당이 크게 비판받았는데.

▷2일이나 9일이나 1년이 지난 지금쯤 보면 9일날 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라 별 문제는 없는 것인데 국민의당이 그렇게까지 욕먹을 일은 아닌 것 같다. 탄핵을 안한다고 했거나 소극적이었으면 욕을 먹을 수 있겠지만 날짜를 잡는 걸 갖고 일주일 국민의당이 욕을 많이 먹었다. 바깥의 촛불민심은 조금이라도 소극적으로 보이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럴 때는 현실적으로 어떤 것이 가능성이 높겠냐는 계산 보다는 그 민심을 받아서 빨리하겠다고 합의를 하는게 촛불민심을 위한 예의 아니었냐 생각한다.

9일 밖에 안된다고 하면 9일 안되면 또 (탄핵을) 안하는 것 아니냐는 촛불민심의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 민심을 박지원 대표가 잘 읽지 못하셨다.

-세월호 관련 내용이 민주당 탄핵소추안에는 없었나.

▷맞다. 민주당 초안에는 세월호 관련 내용을 뺐다. 그 이유는 권성동 당시 법사위원장과 탄핵에 참석하는 비박계쪽과 의논할 때 세월호를 넣으면 비박계에서 10~13명이 이탈한다고 전달을 해왔다. 우리당 입장에서는 만약 이것 때문에 탄핵이 실패하면 그러면 그게 세월호 유가족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되는게 유가족에게 더 도움이되는 것이지 하는 고민이 있었다. 최고위원회에 보고를 할 때도 국민의당 안에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은 국민의당 안대로 세월호를 넣자고 비박계를 계속 설득하자 우리 안은 일단 빼고 초안협상할 때는 그렇게 했다. 비박계 안에서 민주당은 넣을 수도 있고 안넣을 수도 있다는 유연한 태도라는 공감대 형성을 먼저 했다.

-200석을 만들어가기까지 어려움은.

▷촛불민심이 끓어 오르지만 제도권에서는 단계적으로 접근을 한 것이다. 120석의 소수의석이 200석 만드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 바깥의 촛불은 끓어 올라도 탄핵을 추진해야 할 제도권의 리더인 저로서는 분명하게 단계적으로 가서 더 많은 의석을 끌어들이는게 제 목표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광장과 조금 분리돼서 갈 수밖에 없었지만 12월 초순부터는 아예 혼연일체가 돼서 간 것이다. 사실상 지금 말하는 단계적 판단은 11월 말에 제가 최종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4월 퇴진 6월 대선론을 안 받는 것을 판단했는데 작년 이 시점(11월 중순)까지는 4월 퇴진 6월 대선을 받나 안받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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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퇴진 3단계 옵션

-대통령이 2선후퇴 안을 거절했다.

▷그건 끝났다. 그 다음 국면은 새누리당 원로들과 비박계 주장한 4월 퇴진 6월 대통령 선거였다. 그걸 받으면 비박계는 탄핵에 참여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각 당이 탄핵 당론을 정할 때 비박계가 그 주장을 했다. 새누리당의 원로 자문단들, 전직 국회의장단들이 청와대에서 대통령 만났을 때 그 의견을 전달했다. 제가 그걸 보고 있었다. 만약 저걸 받으면 어떤 장점이 있냐면 우선 정치 일정이 명확해진다. 촛불민심은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라는 것이었지만 탄핵이 불투명하던 그 시기에는 4월 퇴진 6월 대선이라는 시점만 명확해도 성과라고 내심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안 받을 거라고 봤다. 어떻게 보면 2선후퇴 국무총리 인선이 더 좋은 안이었는데 왜냐하면 나중에 되치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총리를 추천해도 6개월 맡겼다가 되치기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안 받은 사람이 4월 퇴진도 받을까라고 생각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도 탄핵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가 당시 정무라인 계속 만나고 있었을 때인데 당일날도 탄핵이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민심을 모르고 심지어 여당 내의 여론도 모르고 나라를 움직였으니 소통이 되겠나. 자업자득이다.

-최순실 게이트 관련 정보는 어느 시점부터 얻은 것인가.

▷7월말 8월초부터 구체적 제보들이 들어오는 데 의원실로 들어온 게 많고 저한테 오기 보다는. 제가 TF를 꾸린 이유는 개별 의원을 만나다보니 이런게 이런게 있더라 하길래, 다른 의원을 만나면 다른 얘기를 하고 저는 이게 연결돼 있다고 보고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가령 손혜원 의원은 재벌 모금은 잘 몰라도 차은택 관련 일은 잘 알고 있더라. 재벌 관련 모금이나 청와대 라인이 움직이는 것은 조응천 의원이 잘 알았다. 정유라 체육계는 안민석 의원이 잘 알고. 이 얼개가 정경유착이라는 한 얼개가 있고 문화사업쪽 국정농단이 있고 최순실·정유라 개인비리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안민석 의원은 재벌모금은 잘 모르지만 도종환 의원은 이화여대 비리를 캔 것이고. 그래서 그 분들을 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다 까라고 했다. 의원들이 잘 밝히지 않는데 다 공개하라고 했다. 제가 종합을 해보니 이게 이렇게 돼서 이렇게 온 것이네 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된 거다.

-향후 정치권의 과제는.

▷저는 적폐청산의 본질은 당시 불법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는 것도 물론 적폐청산이지만 그러나 이런 일은 또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또 나타날 수 있다. 제도 개혁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개헌을 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권력자와 권력기관의 문제지이지 대통령의 권한이 의회에 있냐 대통령에 있냐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정원, 검찰 여기에 새로운 견제 기능들을 제대로 안 만들어 놓으면 권력자는 언제든지 권력기관을 활용해서 통치를 하고 싶어 한다.

[윤범기 기자/김정범 기자/조선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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