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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촛불집회 개근, 서울대부터 막노동까지 권병태 씨

[레이더P] 촛불도 태극기도 우리 이웃이자 가족이다

  • 윤범기 기자
  • 입력 : 2018-01-04 15:23:56   수정 : 2018-01-08 10: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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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戊戌年) 새해가 밝았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둘로 쪼개져 있다. 한편에선 촛불집회를 통해 만들어진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개봉한 '1987'이란 영화는 30년의 세월을 건너 광장을 가득 메운 '민주화+촛불세대'에게 찬사를 보내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른바 ‘태극기집회'를 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부에선 혐오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자 가족인 경우가 많다.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통해 촛불과 태극기의 간극을 좁힐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 가능성이 작더라도 그 길을 향해 '레이더P'가 나아가고자 한다. 새해를 맞아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에 참가했던 시민을 만나 그들의 삶과 생각을 들어봤다. 이번 순서는 촛불집회의 열성 참가자였던 시민의 이야기다.

① 천재 끼 번뜩이던 정치학도의 삶
박사수료 뒤 세상풍파 속 막노동 생활
30년만 살아난 ‘분노' 촛불집회 열성참가
성숙해진 시위문화에 놀라운 충격
"복지와 자립 경계에 선 일용직 챙기길…"




권병태 씨(50)를 만나기 위해 서울 노원구에 있는 임대아파트를 찾아갔다. 수많은 촛불집회 참가자 중에서도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서울대를 나와서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지난해 말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권씨와의 인터뷰는 가정사부터 시작됐다. 권씨는 "아버지가 박정희와 정주영을 높이 평가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분"이라고 소개했다. 아들인 권씨가 대학에 들어가 이른바 ‘운동권'이 됐고 어머니는 자식들 편이라 자식들 말대로 따라서 (선거에서) 찍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유한국당 계열의 후보를 계속 찍으시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경북 안동, 어머니는 경북 의성군 출신으로 각각 1940년과 1945년 생이다. 두 분 모두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울산 부두 노동자촌의 단칸방에 자리잡았다. 어린 시절 권씨는 천재 끼가 번뜩이는 문학소년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 1등을 도맡아 했고, 부산 MBC에서 주최한 장학퀴즈에 나가 신기록으로 1등을 하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앨범 사진이 인근 여중생들 교실에 붙기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치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용돈을 벌려고 신문 배달을 했는데, 그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레이건과 카터 중 누가 이길까', ‘전두환 대통령의 아시아 5개국 순방의 의미는 뭘까' 등을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런 정치에 대한 관심은 서울대 정치학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그가 바로 최근 영화 '1987'에서 조명한 87학번이었다. 입학한 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선배들의 말이 다 충격이었다. 영화에선 이한열이 만화동아리에서 5·18 다큐 비디오를 상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를 보고 큰 충격에 눈물을 흘린 ‘연희'처럼 권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권병태 씨가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사진제공 권병태씨]이미지 확대
▲ 권병태 씨가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사진제공 권병태씨]
이후의 삶은 전형적인 '386세대'의 모습이었다. 박종철의 죽음과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6·10 항쟁으로 이어지는 이 영화 속 시기를 권씨는 거리에서 보냈다. 그는 "전두환이 되게 미웠고, 6월 항쟁 때는 서울대 1학년 전체 대표를 하면서 집회 사회도 봤다"고 말했다.

대학 이후 생계를 위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박사를 수료한 후 대학강사부터 국회의원 보좌관, 신문 칼럼니스트를 거쳐 크루즈 사업에도 손을 댔고 학원강사도 해봤다. 그러나 대부분 일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고 이혼의 아품도 겪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공사판의 일용직 잡부, 즉 막노동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대부터 막노동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인생 스토리였다. 한때 운동권이었고, 지금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가 다시 촛불광장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권씨는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를 두 번 정도를 빼면 '개근'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경위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새벽 5시 반 일용직 사무실에 가서 그날 배당될 일을 기다리며 동료들 하고 뉴스를 보곤 했다. 막노동을 하는 동료들도 모두 '최순실 국정농단'이나 권력 좀 있는 사람들의 특권적 사고방식과 행태에 함께 분노했다는 것. 특히 정유라 씨의 입시 특혜에 대해선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다른 동료들은 집회에 나가본 경험이 없었지만 자신은 시위 경험이 있었기에 하루 일을 마치거나 주말에 일이 없으면 오후부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가 촛불집회에서 느낀 점은 새로움이었다. 30년의 세월만큼이나 시민들도 훌쩍 성숙했고 시위문화도 달라졌다. 먼저 폭력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경찰도 많이 자제했지만 우리 쪽도 한번의 폭력사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집회가 끝나고 행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설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유인물을 줍고 있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와 기분 좋다, 이런 성숙한 사람들 속에 있다니"라며 당시 기분을 설명했다.

집회를 할 때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해야했던 1987년과 달리 시종일관 유쾌한 노래와 춤이 함께 했던 것도 차이점이었다. "특히 집회가 끝나면 이순신 동상 밑에서 젊은이들이 항상 랩 공연을 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도 밤 11시까지 랩 공연을 꼭 보고 갔다"고 말했다.

"1987년과 같은 패배가 아닌 승리의 기억이었다는 점이 가장 새로웠다"고 밝혔다. 그는 1987년의 6월 항쟁이 양김의 분열 탓에 선거를 통한 군부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며 당시를 패배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촛불집회가 끝나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용직 사무실에 가서 일을 받고, 저녁 6시쯤 퇴근하는 일상도 그대로다. 지금은 촛불 이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해 줄 것"을 당부했다. "권력층의 너무나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없애나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또한 자신처럼 일용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촉구했다. 그는 "일용직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로 가는 중요한 부분인 거 같다. 이분들이 복지와 자립에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용직을 하지 않으면 바로 노숙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잘살게 된다면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다 잘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일용직 하는 분들도 남들처럼 주 5일 한달에 20일 일하고 한 350만원은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레이더P 기획취재팀=윤범기 기자/이상훈 기자/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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