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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쇼] 꽉막힌 남북 돌파구가 된 밀사·특사

[레이더P] 대부분 밀사…공식 특사는 김만복 국정원장이 유일

기사입력 2018-02-09 14:26:01| 최종수정 2018-02-11 11:31:15
대북특사에 대한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남북 간 대결이 격해지거나 평화 국면으로 전환이 필요할 때 '특사'는 돌파구 역할을 해왔다. 이명박·박근혜정부를 제외한 역대 정부들은 대북특사를 파견함으로써 남북관계 활로를 모색했다.

김대중정부 전까지 대북특사는 공식적인 특사라기보다는 밀사에 가까웠다. 회동 자체를 비밀에 부치고 북한 지도자를 만나 밀담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측에 대북밀사가 아닌 특사 교환을 공식 제안했다. 역대 남한의 대북특사는 누가 있었고,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짚어봤다.



1. 1972년 대북밀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한국전 당시 젊은 모습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재직하던 1951년의 모습. [사진=매경DB]이미지 확대
▲ 한국전 당시 젊은 모습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재직하던 1951년의 모습. [사진=매경DB]
당시 남한의 2인자인 이후락 부장은 1972년 5월 대북특사로서 북한을 방문했다. 비록 비밀회담으로 이뤄졌지만 사상 초유의 남북 회담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대북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Two Koreas)'에서 당시 밀담에서 강대국에 대한 공동의 경계심을 확인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자고 강조한 말이 오갔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김일성은 이 부장을 향해 "외세를 배격하고 싸움하지 말고 민족이 단결하고 그밖에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은 다 덮어두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북한에서는 박성철 북한 제2부총리가 답방 형식으로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밀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해 7월 4일 남북은 '통일을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내용 등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2. 1984년 전두환 정권의 민간특사

1984년 당시 74세 재미동포 임창영 교수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4시간 동안 면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주립대학 정치학 교수였던 임 교수는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는데 1984년 비공식 대북특사로 낙점받고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임 교수는 김일성을 향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김일성 역시 여기에 동의를 표했다. 이후 남북 간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고 남북한 일부 고위 관료들만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3. 1985년 장세동 안기부장·박철언 특보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1985년 9월 북한의 대표단이 남한을 방문해 서울의 근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다. 북한측 특사들은 김일성의 친서를 전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김일성은 "평양에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고 적었다. 전 전 대통령은 북한특사와 장시간 얘기를 나눴고 김일성에게 남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반목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했다.

한 달 후 남한은 답방 형식으로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박철언 특보 등을 비밀리에 평양에 보냈고 김일성과 만났다. 당시 김일성은 남북회담의 조속한 성사를 촉구하는 전 전 대통령의 친서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회담 마지막 날 북한은 남미 합동군사훈련 팀스피릿 훈련 취소 등을 요구했고 남한은 이를 거절했다. 이듬해 1월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을 '북조선을 상대로 한 핵전쟁 훈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남한과의 모든 회담을 무기한 연기했다.



4. 1990년 김일성·김정일 모두 만난 서동권 안기부장

1990년 9월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 남북 국회회담, 적십자회담, 체육회담 등이 재개됐다. 그해 10월 1일 당시 서동권 안기부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서 부장이 방북해 김일성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김정일이 배석한 바 있다. 서동권 부장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동시에 만난 유일한 밀사가 됐다.

서 부장은 당시 김일성이 주요 현안에 대해 하나하나 김정일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서 부장이 김일성과 만나던 10월 1일은 남한과 소련의 수교가 발표된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북측은 1993년 팀스피릿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남북대화를 거부해 밀사 왕래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5. 2000년 DJ의 특사 임동원 국정원장

임동원 대북특사(왼쪽)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사진=매경DB]이미지 확대
▲ 임동원 대북특사(왼쪽)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사진=매경DB]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측에 대북밀사가 아닌 특사 교환을 공식 제안했다. 하지만 연평해전 등이 일어나면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밀사 형식으로 파견해야 했다. 이후 2000년 5월 27일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북한항공 비행기편으로 평양으로 향했다.

4시간 넘게 김정일과 마주한 임 전 원장은 그에 대한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독재자' '북한에서 개방적·실용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 ' 유머감각이 풍부한 사람' 등으로 김정일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바 있다. 이후 2000년 6월 13~15일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고 이후에도 임 전 원장은 2002년 4월 2003년 1월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남북 간 갈등을 푸는 역할을 수행했다.



6. 2007년 첫 공식 대북특사 김만복 국정원장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사진=매경DB]이미지 확대
▲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사진=매경DB]
참여정부 때는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일을 만나 6자회담의 포문을 열기 위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이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이어 1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남북관계가 급랭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7년 8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대북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두 차례 방문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특히 김 원장은 2005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식 임명장을 받은 최초의 공인된 대북특사로 기록됐다.

이후 2007년 10월 2~4일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하지만 이후 북한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활용한 핵실험을 추가 감행하며 이명박·박근혜정부로 넘어오면서 대북특사는 명맥이 끊겼다.



7. 2018년…김홍걸·최문순·박지원 등 거론

최근 대북특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권에서는 대북특사 1순위로 최문순 강원지사를 거론한다. 최 지사는 현재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대표이자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공동집행위원장이다.

김홍걸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도 거론된다. 김 위원장은 최근 한 토크콘서트에서 "우리 정부가 초기에 대북특사를 보냈어야 했고 그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북쪽에서 서운해 한다는 이야길 들었다"며 대북특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대북특사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을 꼽기도 했다. 박 의원은 2000년 문화부 장관 역임 당시 베이징에서 북한 고위급 관료들을 만나 회담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한 경험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해찬 의원을 거론하기도 한다.

[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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