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인터뷰

[인터뷰] "잘사는 대한민국 소망"…태극기집회 열혈 참가 50대

[레이더P] 촛불도 태극기도 우리 이웃이자 가족이다

  • 김정범, 조선희 기자
  • 입력 : 2018-01-30 13:47:06   수정 : 2018-01-31 14: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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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쌀 구경도 못했던 가난 겪은 중년 남성
경제성장 이끈 '박정희의 공' 높이 평가
"기존 언론보다 팟캐스트가 진실" 믿어
가족·주변 만류에도 태극기집회 꾸준히 참가


대한민국은 둘로 쪼개져 있다. 촛불집회를 거쳐 새 정부 출범 2년 차를 맞은 가운데에도 통합은 멀고 험난하다. 이어지는 적폐 청산과 재개된 남북 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다르다. 부지불식간에 촛불의 반대말은 '태극기'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과 명예 회복을 주장하는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이 '촛불 시민'의 대척점에 있다.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통해 촛불과 태극기의 간극을 좁힐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 가능성이 작더라도 그 길을 향해 '레이더P'가 나아가고자 한다. 새해를 맞아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던 시민을 만나 그들의 삶과 생각을 들어봤다. 이번 순서는 태극기 집회가 삶의 일부가 된 50대 중년 남성 이야기다.



그를 만난 곳은 '종로'였다. 서울의 중심 '정치 1번지'로 각인된 곳이다. 최근에는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장소로 통한다. 불현듯 태극기 물결이 종로 도심을 메웠던 사진이 떠올랐다. 태극기 집회의 '홈그라운드'인 만큼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 어느 날 '○○전자 △△△'라는 사원증을 보여주는 그에게선 대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50대 가장의 모습이 보였다. 태극기를 흔드는 보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인터뷰 요청을 할 당시 '왜 태극기 집회에 꾸준히 나가느냐'는 질문에 "60년대 생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시대를 체험한 당사자로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까지 지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던 게 떠올랐다.

자리를 옮겨 인생사를 들어봤다. 그는 제주도 출신이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제주도였고 '제주 4·3사건'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그는 "4·3사건 당시에 폭도들이 내려와서 동네 이장 격이던 할아버지를 죽창으로 찔렀다고 들었다"며 말을 꺼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제주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됐는데 그걸 기억하는 듯했다. "동네 뒤에 돌을 쌓아서 폭도가 죽인 사람들 제사를 치르려고 하면 동네 사람들 간에 싸운 적도 있었다"던 그는 "당사자는 아니지만 민감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난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더 강렬한 듯했다.

"60년대 생이니까. 제주도에선 쌀이란 걸 못 먹어봤어요. 논이 없어서 내내 보리쌀, 고구마, 그것도 없어서 (옥수수 또는 우유) 가루에 섞어 가면서 먹고요. 70년대 들어 초등학생 때는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 이런 내용의 박정희 대통령 지침이 학교까지 내려와서 (전봇대에) 표어 붙이고 그랬어요. 워낙 못살 때니까 솔충이('송충이'의 제주 방언) 잡으려고 학교에서 단체로 나가고 쥐도 잡아야 한대서 쥐 잡아다 꼬리 잘라서 '나 몇 마리 잡았다' 하면서 70년대가 흘러갔죠."

가난한 시절의 한국을 경험한 이들에게 지금의 한국은 별천지다. 이만큼 바뀌고 잘사는 걸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 10위 정도 됐는데 근간 산업인 전자·중화학공업 등은 박정희 대통령이 뿌리를 다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처럼 근대화를 거치며 잘살게 해준 사람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에 대해 굉장히 공감하고 대단히 큰일을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 '맥'이라고 하잖아요. 맥을 그대로 이어 가는 거죠."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전까지 아버지를 보좌했던 셈이다. 태극기 시민에겐 그 '이미지'가 각인된 듯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20대부터 청와대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며 "그러면서 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게 몸에 뱄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도 '그가 욕심부릴 게 없다'는 근거가 됐다.

박정희·박근혜 지지자였던 그에게 재작년 터진 국정농단 사건은 엄청난 좌절을 안겨줬다. "진짜 그랬나 싶었다"던 그는 이후 언론을 안 보게 됐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는 내용들이 보기가 싫었던 것.

"그러다 유튜브를 보니 '최순실 태블릿이 가짜다' 이런 얘기가 있는 거예요. TV나 신문을 보고 실망했던 사람들이 거기로 모이기 시작한 거죠. 거기선 '진실'을 알려주니까요." 유튜브 내 일부 보수 채널에선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다루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 관련 이야기를 다뤘다. 그는 그걸 보면서 '탄핵이 조급하게 결정됐다'와 '태블릿 PC는 최순실 것이 아니다'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유튜브를 통해 보수와 관련된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 유튜브 내 보수 채널을 보고 모인 사람들과 태극기 집회에 나왔고 저절로 집단이 형성됐다. 지금도 TV 뉴스보다는 유튜브를 보며 희망적인 결과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생활이 유튜브 위주예요. 저녁에 집에 가면 (유튜브를 보고) 어디 이동할 때도 유튜브 동영상 몇 개 쭉 보고 밴드에 올라오는 댓글 읽어보죠. 내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대선을 치르면서 가족들과는 더 이상 정치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들과 정치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 땐 30대인 딸·아들에게 "그런 얘기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 9~10명이 나랑 반대세력이에요. 우리 식구도 마찬가지고. (아내) 주변 사람들한테 태극기 집회 나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봐요."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간을 들여 태극기를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다 함께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 만드는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70·80년대는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한마음이 돼서 마을도 가꾸고 공장도 만들고 이런 식으로 국민들 간에 하나로 통하는 게 있었어요. 앞으로 '우리 진짜 세계에서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보자' 이런 식으로 가주면 가장 바람직하죠."

그는 요새 '태극기 집회'와 '판소리'가 삶의 전부라고 했다. 판소리는 그가 노후를 위해 택한 삶이다. 은퇴하고 무엇을 할까 하다 2010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4년째 봉사를 다니며 판소리나 민요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행복한 일이죠. 애들도 다 직장 다니고 있고요"라는 그는 아들딸 잘사는 것에 만족하며 은퇴 후를 걱정하는 평범한 50대였다. 다른 점이라면 토요일, 태극기 드는 것을 의무쯤으로 생각한다는 점뿐이었다.

[김정범 기자·조선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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