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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쇼] 북·미회담 열쇠 `핵사찰`…추방과 재개 반복

[레이더P] 2009년 사찰 중단…NPT·IAEA 탈퇴 상태

  • 김정범 기자
  • 입력 : 2018-03-13 13:57:00   수정 : 2018-03-14 14: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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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발사 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16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발사 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16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북한의 핵사찰 수용이 북·미 대화 성공의 1차 관문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수년간 중단됐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사찰과 관련 논의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아마노 유키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북한 핵시설 사찰이 가능해지는 대로 신속하게 움직임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유키야 아마노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유키야 아마노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사진=연합뉴스]
최근 일본 정부가 북한이 IAEA로부터 핵사찰을 받게 될 경우 인원과 기자재 조달에 필요한 초기 비용 3억엔을 부담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2009년 IAEA 감시요원을 추방한 뒤 핵사찰을 받지 않고 있는 상태다. 북·미 회담의 중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이는 북한에 대한 핵사찰의 과거를 살펴본다.



1. 1985년 北 NPT 가입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NPT는 핵시설을 설치할 경우 군사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감시하도록 IAEA와 안전조치 협정을 맺고 이를 이행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당시 소련의 요구 때문이라는 게 통설이다.

소련은 북한과 1985년 핵발전소 건설 협정을 체결했는데 당시 조건은 NPT 가입이었다. 핵발전소는 원자력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정됐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핵발전소 건설은 전면 중단됐고 북한은 소련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감행했다.



2 1993년 사찰 거부·NPT 탈퇴 엄포

1993년 2월 북한의 비밀 핵 개발 계획이 유엔에 적발돼 규정 위반 경고를 받았고 대북 결의안과 함께 IAEA 특별사찰 명령이 발동됐다. 북한은 IAEA 이사회의 특별사찰 촉구 결의가 채택된 데 불만을 품고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3개월 뒤 뉴욕에서 열린 제1차 북·미 고위급 회담 등의 중재 노력을 통해 양국은 북한의 NPT 탈퇴를 유보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94년 10월 21일 채택된 제네바 합의에서도 북한의 NPT 당사국 잔류를 명시했다. 이후 그해 7월 북한은 미국과 2단계 고위급 회담을 제네바에서 개최하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당시 합의 내용은 IAEA 사찰을 수용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 회담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3. 1994년 IAEA 탈퇴 선언

영변에 위치한 핵시설은 1994년 북·미 간 체결한 제네바 기본 합의에 따라 IAEA의 감시하에 있었다. IAEA 대표단은 영변 원자로 연료봉 교체 입회 형태와 절차 등을 협의하기 위해 그해 5월 평양에 파견됐다. IAEA는 이들 시설을 봉인한 뒤 무인카메라로 24시간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북한이 미국이 제네바 기본 합의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암운이 드리워졌다. 당시 북한은 "미국이 우리를 악의 축으로 지명하고 핵 선제 공격 대상에 올려놓은 데 이어 중유 제공 중단으로 조·미 기본합의문을 사실상 파기해 버렸다"고 이유를 밝혔다. 결국 북한은 그해 기존에 가입돼 있던 IAEA를 탈퇴했다.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함에 따라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하는 등 한때 한반도 정세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4. 1995년 IAEA 사찰 개시

1995년 북한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995년 12월 경수로 공급 협정을 체결하고 워싱턴과 평양에 양국 연락사무소를 개설했고 IAEA의 사찰도 재개됐다. 이를 위해 그해 사용한 연료봉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것. 이듬해인 1996년 경수로 1호기 건설 공정을 시작했고 경수로 1기 완공 후 전력 생산 때까지 미국과 남한은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했다.

1999년에는 IAEA의 특별사찰이 시작돼 핵 연료봉을 제3국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방북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2001년 정권을 넘겨받은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 기본 합의를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경수로 건설을 중단했다.



5. 2003년 결국 NPT 탈퇴

부시 정권과의 마찰 등으로 인해 북한은 2002년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북한은 핵동결 해제 및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했으며, 북·미 합의는 유명무실하게 됐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중유 제공 중단에 따라 북한이 핵시설들에 대해 동결 해제 조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우리는 중단했던 원자력발전소들의 건설을 완공하게 되며 폐연료봉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방사화학실험실도 가동시키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이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한 뒤 상주 사찰관을 파견해 북한의 핵 감시장치 제거 및 원자로 재가동 동향을 관찰해 왔다. 사찰관 추방을 통해 북한 핵 동향에 대한 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을 통해 NPT 탈퇴를 유보해 왔지만 2003년 1월 결국 북한은 NPT 탈퇴를 못 박았다.



6. 2007년 5년 만에 사찰단 재입국

IAEA 사찰단은 지난 2002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사찰단이 추방된 뒤에 약 5년 만에 다시 입북했다. 2007년 엘바라데이 당시 IAEA 사무총장이 전세기편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북한이 다시 검증 철차로 돌아왔고 이것이 NPT 가입과 그리고 핵무기 철폐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은 북한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도 인내하고 존중하면서 조금씩 상호간에 신뢰를 쌓아나가고 있다"며 대북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합의에 따라 IAEA는 북한의 핵시설 폐쇄 및 봉인 상태를 감시하기 위한 요원 2명을 북한에 상주시켰다. 이후 2008년 5월 북한은 미국에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요청했고 미국은 그해 10월에 이에 응했다. 북한은 2008년 북핵 문제의 상징인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전시성 행사를 벌이면서 국제사회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7. 2009년 이후 중단된 핵 사찰

지난 2009년 4월 북한은 지난 14일 IAEA와의 모든 협력관계를 즉각 중단한다고 선언한 뒤 영변 핵시설에 상주하는 2명의 감시요원에 대해 조속히 국외 퇴거하라고 통고했다. 이들 감시요원은 영변 핵시설의 봉인 전부를 철거하고 감시 카메라의 전원도 끊고 영변을 떠났다. 영변 핵시설에서 불능화 작업을 하다가 퇴거 통보를 받은 미국 작업팀도 함께 평양을 떠났다.

지난 2009년 추방한 IAEA 사찰단을 다시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졌다. 국제사회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은 이듬해인 2010년 미국의 유명 핵물리학자 지그프리트 해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에 위치한 대규모 농축우라늄 생산시설을 공개했다.

[김정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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